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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휠체어 탄 의사 류미님의 우공비는 끊임없는 도전이다!(913) | 17774 | 40 |
휠체어 탄 의사 류미님은 박리성 골연골염으로 겉보기엔 표 나지 않지만 최대한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10분, 걷기도 30분 이상 할 수 없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1년 사고를 당해 양쪽 발목을 크게 다쳤다. 기브스를 한 채로 대학 입시를 치르면서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에 진학했으나, 1학기 만에 자퇴하고 이듬해 이과에서 문과로 바꿔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다시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중앙일보 입사 시험에 지원해 최종 전형에까지 갔지만, 산을 올라야 하는 1박 2일 면접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다시 도전하여 경향신문에 입사했고 3년간 편집기자로 일했다. 그러다가 의사가 될 결심으로 문과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가톨릭대학교 의대에 편입하여 의사의 꿈을 이루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의 학창시절은 말하자면 파란만장한 편이예요. 왜냐하면 대학교를 세 군데나 다녔거든요. 그것도 각각 다른 전공으로요. 첫 전공은 의생활학과였고, 두 번째 전공은 불문과, 그리고 마지막 전공은 의학이에요. 이과에서 문과, 다시 이과로 갔으니 좀 정신이 없지요?
처음 의생활학과는 원하던 과는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큰 사고를 당해서 한 달 정도 학교를 못가고, 입시도 휠체어를 탄 채로 치러야 했거든요. 다행히 합격은 했지만, 전혀 관심이 없는 전공을 공부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어요. 결국 저는 한 학기 만에 자퇴를 하고 방황했지요. 결국 그 시절, 주로 했던 일은 소설 읽는 것이었고요.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문학을 공부하자. 이과에서 문과로 방향을 틀고 나서 다행히 점수가 오르더군요. ^^ 학창시절부터 저는 수학과 물리를 가장 어려워했거든요. 물리를 할 필요가 없어지고, 수학도 더 간단해지면서 저는 점수가 올랐고, 결국 생각했던 대학의 불문과를 진학했어요.
그런데 재수 후 대학교에 들어가서 자유를 맛보게 되자, 그전까지는 크게 인식하지 않고 있던 힘든 현실 하나에 부딪혀야 했어요. 그건 다름 아닌 사고로 다친 발목이었어요. 수술을 했지만 다친 발목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저는 30분 이상 걸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지요. 그래도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던 걸까요. 불문과를 졸업 후 겁도 없이 신문사에 응시하였어요. 30분도 못 걷는 다리를 가진 기자라...확실히 금방 생각할 수 있는 이미지는 아니지요? 신문사는 튼튼한 사람을 원했고, 입사 마지막 관문은 등산이었어요. 저는 결국 떨어졌지요. 그래도 최종까지 갔는데, 하는 마음에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저는 다른 신문사에 편집기자로 들어갔어요. 편집기자는 다른 취재기자들이 쓴 기사의 제목을 달고, 기사의 중요도에 따라 지면에 배치하는 일을 주로 한답니다. 물론 사무실에 앉아서요. ^^
사람이 알고 싶어서 저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편집기자일이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무생물인 ‘글’을 만나는 일이었어요. 슬슬 변덕이 생기면서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나도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또 받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죠.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게다가 저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변수가 하나 더 있었잖아요. 30분 이상 걸을 수 없는 다리 말이에요. 그렇다면 ‘앉아서 하면서 사람들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며칠을 고민하고 나니 답이 나오더군요. 그래, 정신과 의사가 되면 좋겠다. 그러자 제 울적했던 학창시절이 다시 한 번 떠오르더군요.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경쟁이 매우 치열한 특수고등학교였거든요. 많은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받았고, 저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요. ‘내가 학창시절에 내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멘토라는 거창한 이름까지는 아니라도 어른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더더욱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러나 의대에 들어가는 것은 역시 쉽지가 않더군요. 게다가 이과에서 문과로 바꿔 성적이 올랐으니까 이번에는 성적이 떨어질 차례였잖아요. 신문사를 그만 두고 다시 친 대학입시에서 저는 보기 좋게 낙방했어요. 회사도 그만둔 상태에서 떨어진 터라 더더욱 막막했죠. 그러다가 우연히 의대편입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어요. 이후 제가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시험을 칠 수 있는 의대편입방법을 찾는 일이 시작되었죠. 수학이 없을수록 저는 유리했으니까요. 결국 영어, 논술, 학과 성적, 면접으로 시험을 치는 가톨릭대학교 의대에 편입하게 되었어요. 대학낙방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죠.
의대는 시험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어요. 시험은 앉아서 치니까요. ; 그러나 의대를 마치고 정식 의사면허를 따고 병원에서 일하게 되니까 저의 발목이 또 발목을 잡더군요. 다시 방황이 시작되었어요. 의대를 졸업하면 보통 인턴, 레지던트과정을 거치거든요. 그런데 인턴은 정말 병원의 갖은 잡일을 하는,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거든요. 삼십분도 걸을 수 없는 저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몇 번의 탈락 끝에 들어간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인턴생활을 해보면 되지 않겠냐.’ 고 먼저 제안해주었어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일이지요. 저는 결국 휠체어를 타고 인턴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가운을 입고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것을 마치면 정신과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일 년을 버틸 수 있었지요.
정신과 의사가 되고 나니까 나름 파란만장했던 저의 과거가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보면서 자신도 치유되는 면이 있다고들 말을 하거든요. 저도 다시 한 번 저의 과거를 복기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런데 휠체어를 타고 의사 생활을 했던, 어떻게 보면 약간 별난(?) 저의 경험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어요. 항상 몸이 아파서 위축되어 있었던 저에게 그런 경험은 처음에는 낯설었지요. 그러나 그 덕에 저는 조금씩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늘처럼 결국 여러분을 만나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지요. 모쪼록 여러분도 좌충우돌, 파란만장의 길을 거쳐 선택과 집중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라요. 단, 저처럼 몸 다치는 일이 없이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건강한 몸은 더 많이 좌충우돌할 수 있으니까요. ^^ 그럼 여러분 모두 씩씩하게 자신의 소중한 꿈을 찾고 키워나가길 빕니다. 홧팅.^^
1. 첫 직장을 활동이 많은 기자로 선택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2. 끊임없는 도전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3. 여러 가지 이유로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한마디
<미니이벤트 당첨자 발표> comto1234, igemoya69, tdj06061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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